상업성 없는 음악을 하면서 진지하게 작업해 발매하는 뮤지션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발언을 들었다.
직접적으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 이야기의 방점이
나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약간은 우습기도 하다.
때때로 취향에 대한 판단은 커다란 오만이자 비약으로 작용한다. - 아마 나에 대한 조소 섞인 발언이었겠으나, 달리 기분이 나쁘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날 선 감정이 앞서지 않은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의 취향은 다양하며, 상업성이나 대중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함부로 정의내리는 것은 어쩌면 아티스트로써 가질 수 있는 숨의 종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음악, 작품의 최초 청취자/감상자는 아티스트 본인이다.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고, 비로소 그것을 세상에 흘려보낼 수 있을 때(혹은 그래야만 할 때) 작품은 창작가의 손을 떠나 대중들에게로 간다.
예술가가 작품을 세상에 보였다는 것은 최초 소비자로써 표할 수 있는 일종의 만족의사이다. 그것은 수요의 존재에 대한 반증이며,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영혼이다.
따라 어떠한 작품을 더러 상업성 부족한/대중성 없는 등의 수식을 접두하여 평하는 것은 예술가로써 자살이 된다. - 최초 청취자로써의 만족 : 즉 그 아티스트 본인의 취향 및 기준 자체를 싸그리 무시하는 행위이므로.
또한 이것은 미래의 소비자들에 대한 무시이기도 하다. 상업성에 대한 판단은 아티스트 개인이 아닌 대중의 몫이다. 대중이 어떤 음악을 선택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아직 선택하지 않은, 어쩌면 그 취향을 공유할 수도 있는 잠재적 소비자의 취향에 대한 무시이며, 또한 그들은 그 아티스트 본인의 소비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사고는 예술가의 혼을 병들게 할 뿐이다.
나는 순수성을 잃은 음악을 혐오한다. 진심으로 그것이 좋아서, 너무 아름다워서 참지 못해 토해낸 뜨거운 청춘의 잔열을 나는 사랑한다.
어떤 이름으로든 저급한 기준에 의해 수식되고 평가되어 분류되는 꼴은 보고싶지 않다. 당신의 잘나신 그 음악이 많은 인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사유재산이라는 그 잘난 밴드와 함께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