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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 - 1

naelmaybe 2025. 1. 2. 00:06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잡기에도 부족한 찰나를 바라보던 소녀는 눈을 감았다.

아, 소녀라기에도 이미 부서진 형체, 그 안에 사무치듯 운행하는 영혼의 놀림 아래로 흐르는 안개는 썩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터져나온 빛 속에서 울적함이 얼굴을 감싸도, 썩어들어간 눈물샘에서 더 흐를 무엇이라도 있으랴,

계속해서 반복된다, 변하는가? 더욱 사무치자. 이건 고통일까? 쓰라린 가슴에 혼란스러울 여유조차 없다.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 환상의 희미한 목소리에게 쉴 새 조차 주지 못하고, 훨훨 날아오른 새가 머리 위를 도는 양,

 

자꾸만 씹히는 아쉬운 기억은 마치 손에 쥔 모래처럼 사르르 놓쳐버리고 만다.

 

점점 편안해질거야, 몽롱해지는 정신에 떠오르는 내 목소리일까?

 

순간 빛이 사라지고, 새파란 들판이 펼쳐진다. 봄 내음 채 가시지 못한 푸르른 여름의 한 장을 뗴어다 놓은 양 찬란하게 빛나는 풍경 속에 선 그녀는 부드러이 바람을 맞는다.

 

따스한 햇빛을 스쳐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옷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살결을 어루만진다.

 

금요일의 포근한 침대처럼, 따스하고도 부드러운 감촉은 어쩌면 시원하기도,

 

그녀의 새카만 머리칼을 내리쬐는 햇빛은 적당히 뜨거워, 머리에 손을 올려 뜨거운 감각을 느껴보고픈 기분이지만

 

움직임을 가지기에도 귀찮아, 그저 양 팔을 늘어뜨린 채 다가오는 세상을 느낀다.

 

그녀의 코 곁에 머무르는 봄 내음은, 지나칠 정도로 능동적이지 못해서, 아니 이질적일 만큼 정적이어서, 다시는 이 봅이 떠나가지 않으리라고 외치는 듯,

 

그녀의 세상은 멈추어 있었다.

 

잔디 위로 피어난 민들레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저 숲 너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새가 울어대며 그녀의 귓가에 넘실넘실,

 

언젠가 보았던 듯 노스텔지어를 일으키는 새하얀 실크 원피스를 걸친 소녀는

 

죽은 듯 그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세상 속에 잉태되고야 말았다.

 

  • 기억

 

별무리가 지난 하늘은 새파랗다. 이정표도 없이 아주 느리게 터져가는 뭉개구름 위로, 생각들이 죽어간다.

 

새하얀 실크 원피스를 걸친, 검은 머리의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들판을 거닐고 있었다.

 

저 언덕 너머로 아름다이 펼쳐진 숲이 노래한다. 바람이 흔들어대는 새파란 풀빛에 눈이 부시다.

 

저벅이며 죽어가지 않는 자연을 거닌다. 이질적이고도 아름답다.

 

하늘 위로 날아오른 기억이 터져 작은 세상을 이룬다. 

 

채워지는 세상 만큼 부풀어오른 마음은 내려올 새를 알지 못한다.

 

저 멀리, 아니 저 높이 날아오른 새들은 자유로이 세상을 활공하며 바람을 일으킨다.

 

그떄, 아주 큰 새가 그림자를 드리운다. 새하얀 털에 노란 깃을 가진, 아름답고도 어째선가 신비로운, 깊은 눈을 가진 새의 날갯짓에 세상이 요동친다.

 

거센 바람은 세차지만 밉지 않다. 소녀는 아랑곳 않은 채 계속해서 들판을 걷는다.

 

커다란 새는 날아, 날아, 저 멀리 사라진다. 언젠가처럼 다시 돌아오리라 약간의 아쉬움조차 없는 채로 시선을 던져버린다.

 

소녀의 세상은 아름답다. 그 어떤 아름다운 존재도 그 세상의 평화를 어루만질 수 없다.

 

깨끗하고 찬란하나 신성한 것은 아니었다. 여느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처럼 찬란하게 빛나기만을 반복하는 그녀의 세상 속에

 

낮이 죽어가고 태어나길 반복한다.

 

어두워진 세상은 별무리로 가득해, 은하수는 노래를 멈추지 않아. 그녀는 단잠에 빠지지만 여전히 세상을 느낀다.

 

결코 어떤 아픔도 그녀의 곁에 머물 수 없다. 환상과 같은 이 세상의 모습은 결코 단단한 것이었다.

 

영혼이 영혼을 이루고, 세상을 채워간다. 아름다운가, 지루하지 않다. 행복으로 채워지길 멈추지 않는 이 세상에 생기란 없지만,

 

“팟 -“

 

소녀는 들판 한가운데에 선 채 눈을 뜬다. 이명인지, 실제로 무언가 발생한 것인지 알 만큼 또렷하지 않은

 

기억을 쥔 소녀의 손 안에 모래가 한 줌 집힌다.

 

소녀의 눈에 새하얗고 아름다운 꽃이 보인다. 순수하다. 사랑스럽다.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작은 꽃이 일으키는 어떤 감정은, 그녀를 사로잡아,

 

어떤 커다란 노스텔지어가 그녀를 덮쳐온다. 어떤 기억도 남지 않은 가슴으로 온 힘을 다해 세상을 잡아보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엔 모래 한 줌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뜨거운 액체가 그녀의 눈가를 타고 흐른다. 그녀의 눈 아래를 적시며 흘러내린 저 작은 방울은 마치 이슬이라도 된 양 작은 풀의 위에 잠시 자리잡다, 이내 떨어져 사라진다.

 

그녀의 새벽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한참동안 무표정으로 흐르는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가슴은 그런 서글픈 무언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는 양 자꾸만 채워지려 몸부림치지만,

 

순간 무언가 넘쳐버린 , 그녀의 가슴 무언가가 도망쳐버렸다.